충청북도의회 5분자유발언
정상혁 의원 5분자유발언
보은군 출신 정상혁 의원입니다. 존경하는 150만 도민 여러분! 그리고 의장님, 동료의원님, 지사님, 교육감님, 관계공무원 여러분!
본 의원은 우선 지난해 전국체육대회에 이어서 금년에 전국장애인체육대회와 전국소년체육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룸으로써 우리 도의 위상을 한층 높인 이원종 지사님과 김천호 교육감님 그리고 관계자 여러분의 노고에 대해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본 의원은 보국안민의 기치아래 부패척결 및 신분제도 타파와 국권수호를 위하여 일어난 근대민족운동이었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명예회복과 관련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작년 3월 5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특별법이 제정됨에 따라서 현재 각 시·도 실무위원회에서 신청을 받고 있는데 지난 5월말일 현재 충청북도에는 8건이 접수되었다고 합니다.
너무 실적이 저조하다는 생각듭니다. 첫 번째 질문으로 집행부는 이렇게 실적이 저조한 사유가 무엇이라고 보며 신청 실적을 높이기 위해서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는지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학농민혁명사를 보면 충청북도는 그 중심무대였었고 충북에서 시작해서 충북에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충북출신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존재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대단히 안타깝고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별법시행령 제8조에 신청서에 첨부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였음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 또는 문헌을 개인이 구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는 데 애로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반란자로 몰려 고향을 떠났거나 떠나지 않았다 해도 참여 사실과 자료를 후손에게 전해주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 후손들이 받았다고 하더라도 한 세기가 지나간 지금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가장 손쉬운 것은 관찬 사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두 번째 질문으로 집행부에서는 유족등록신청서에 자료로 첨부할 수 있는 충청북도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시대별, 지역별, 인물과 활동상황 등 전반에 걸쳐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충청북도가 발간한 관찬사료가 있는지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의원은 동학농민혁명사를 되돌아보면서 충청북도와 동학, 동학과 농민혁명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19세기 후반기 우리 역사를 민란의 시대로 규정하는데 왜 그러면 이렇게 많은 민란이 일어났는가. 영국의 작가 비숍여사가 당시 관리들이 갖가지 명목으로 세금을 징수하고 농민에게 고이자로 돈을 빌려준 뒤에 재산을 빼앗고 시도 때도 없이 농민들을 동원해서 부역을 시키는 현실을 보고 양반계급으로 구성된 관료층을 민중의 피를 빨아먹는 “면허받은 흡혈귀”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그 시대의 사회가 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동학이 급속히 파급되게 되고 농민들이 결집하게 된 배경에는 정부의 무능과 부패, 불합리한 신분제도, 일본의 무력 개입에 연유되었습니다마는 충청북도의 동학농민혁명의 발단과 그 전개상황은 정말로 너무나 눈물겹습니다. 1875년 2월 동학창도자 최제우의 후계자 최시형이 단양에 있는 도솔봉밑 새두둑이라고 하는 데 정착을 하면서 동학은 충북 전역에 확산되었습니다. 또 1885년 6월 충청감사와 단양군수가 최시형의 체포령을 내리면서 보은 장안으로 피신하게 되면서 동학은 전라도 등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1892년 7월 교조신원 운동에 앞장선 서민주와 서병학이 충북 출신이었고 12월 교조신원과 동학탄압 중지를 지휘한 본부도 바로 보은 장안이었습니다. 1893년 2월 8일 광화문 복합상소를 준비한 곳도 청원 남일면 신송리 손천민의 집이었고 11일부터 사흘 밤낮을 엎드려서 곡을 한 박광호, 손병희, 김연국, 손천민, 임규호 등도 역시 충북 출신이었습니다. 13일 정부가 복합상소 동학도들에게 “집에 돌아가 생업에 힘쓰면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해산을 시킨 후에 주동자 체포에 나서자 3월 10일 최시형이 청산에서 전국에 있는 동학도들에게 보은 장안으로 모이라는 통문을 보냈습니다. 20일에 2만3,000명이 보은 장안에 모여서 처음으로 “척왜양창의” 깃발을 걸고 성을 쌓고 집회를 한 곳도 역시 보은 장안이었습니다.
이를 주도한 인물 역시 충북 출신들이었습니다. 25일 청주 병영군 600명이 진압에 나서자 4월초 보은에 모였던 동학농민군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상소나 올리고 구호만 외쳐서는 뜻을 펼 수가 없다. 힘으로 직접 쟁취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1894년 1월 10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농민들이 관아를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고 만석보를 파괴하면서 전봉준은 동학을 매개로 전국적인 무력투쟁을 결심하고 충청도와 전라도의 동학교도들에게 통문을 보냈습니다.
전봉준을 따르는 농민군은 고부 등 전라도 10개 지역을 점령하면서 폐정개혁을 요구할 때 충청북도 동학농민군은 3월 22일 황간, 영동, 보은, 옥천에서 사대부를 구타하고 4월 1일 충주에서 관리 6명을 살해했고 4일 청주성 밖에 충청, 강원, 경상도 동학도들 3,000명이 모여서 봉기를 했으며 19일에는 충북의 3분의 1을 점령했습니다. 4월 중순 충청감영이 논산, 옥천 등지의 동학농민군 수백 명을 살해하자 보은, 청주, 청풍 지역의 동학도들은 전봉준 부대와 합류해서 23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고 27일 2만여명이 전주성을 점령했습니다. 청산과 보은에 집결해 있던 충청, 강원, 경상도 동학도들은 5월 7일 전주성 점령 동학농민군이 “정부는 정치를 개혁하고 동학농민군 신변을 보장하기로”화약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을 하는데 청주병영군이 나서서 체포를 하자 다시 전라도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6월 23일 일본군이 부산에서 서울로 병참로를 개설하면서 물자, 인부를 강제동원함에 따라서 7월 2일 보은, 12일 영동, 18일 옥천에서 수백명이, 23일 청풍에서 300명이, 단양, 제천, 영춘에서 6,000명의 동학농민군이 봉기를 했고 8월이 되자 동학농민군은 충주, 청풍, 단양, 제천, 영춘 일대를 장악을 했는데 주도한 인물은 청풍 송계리 출신 농민 성두환이었으며 5일 제천, 청풍, 영월, 평창의 동학농민군은 강릉을 장악했습니다. 10일 출옥한 서장옥은 청주로 와서 동지를 규합하면서 전봉준과 서울공격을 합의했습니다. 18일 청산에 있던 최시형은 전봉준에 협력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25일 대대적인 동학도 동원령을 내리면서 보은 장안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손병희가 통솔하게 하였습니다.
동학농민군은 삼례와 남원에다 대도소를 설치하고 서울을 점령한 뒤 일본세력을 몰아낼 계획을 했는데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공주 충청감영과 청주 병영, 충주 가홍 일본군 병참부를 격파해야 되었으므로 남일면 송산리 손천민 집에서 화승총, 칼, 화약을 준비하고 강내면 궁현리, 북일면 손병희 집을 근거로 해서 훈련을 했는데 23일 서장옥과 손천민의 지휘로 1만여명이 청주성을 공격했습니다. 초반 동학농민군은 기세가 올랐으나 병영군이 스나이더 소총으로 반격해와 무심천 건너로 후퇴를 하고 며칠간 교전을 했지만 병영군은 붙잡힌 동학농민군을 살해해서 지금 육거리에 그 시체를 쌓아 놓았습니다. 28일 병영군이 대포를 쏘며 무심천을 건너옴으로써 참혹한 패배를 하게 된 동학농민군의 시체가 무심천 제방과 남들에 널려있었습니다.
한편 9월 17일 청풍 동학농민군 30명과 20일 연풍 김명길이 일본군에게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강릉에서 들은 성두환이 동학농민군 1만명을 인솔하고 단양, 제천, 영춘을 점령했지만 10월 1일 청풍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했습니다. 3일 청주병영 영관 염도희가 한밭으로 들어올 때 회덕 동학농민군이 이들 73명 전원을 살해했는데 이들을 추모하고자 사당을 짓고 제를 올려온 곳이 바로 청주 모충동에 있는 모충사입니다. 15일 성두환은 정선을 점령하고 11월 5일 평창에서 치열한 전투를 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돼서 이듬해 3월 전봉준과 함께 사형을 당했습니다. 10월 5일 일본군 5,800명과 정부군 2,800명 보조 병력 등 토벌군은 용산을 출발해서 청주로 향했는데 9일 이두황 부대가 음죽에, 18일 동로 중대가 장호원에, 22일 중로 중대가 진천에 도착해서 포위해 들어왔고 동북쪽은 가흥 일본 병참군이 들어오면서 동학농민군의 집을 불태우고 가족의 목을 쳤습니다.
그 이전에 9월 25일 진천, 충주에 집결했던 동학농민군은 29일 진천 관아를 점령해서 무기를 탈취했고 10월 6일 음성 무극 장터와 진천 구만리 장터에 있다가 북으로 향한 3만명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1명을 사살했지마는 2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채 가흥으로 후퇴를 하였으며 남쪽으로 향한 농민군은 괴산 관아를 점령하고 아전 1명을 사살하고 보은으로 떠났습니다. 한편 토벌군 이두황 부대는 11일 청안을 거쳐서 12일 청주 병영에 도착했고, 13일 장위영과 경리청 진남영 병대와 함께 상당산성을 넘어서 보은 중티에 도착해서 동학도 30명을 체포하고 길곡이라는 데에 머물렀습니다. 14일 중티에서 체포한 자 중 12명을 처형하고 한림역에서 동학도 3명을 처형한 후 진남영 장졸은 보은읍에 주둔하고 이두황 부대는 장안으로 가서 동학도 두 사람의 목을 베고 최시영이 머물던 큰 기와집과 초막 400여채, 민가 수 백호에 불을 지르고 보은으로 돌아갔습니다.
동학혁명의 싹이 트고 자란 곳, 지휘본부였던 동학농민혁명의 성지 보은 장안은 1894년 10월 14일 잿더미가 된 후에 지나간 110년 동안 누구하나 찾아오는 이 없이 지금은 무너진 돌성의 조각들만 나뒹굴고 있습니다. 한편, 11일 보은 장안을 빠져나간 최시형이 이끄는 북접 동학농민군 6만여명은 청산을 거쳐서 14일 영동과 황간으로 이동했고 16일 손병희가 지휘하는 “갑” 부대는 논산에서 전봉준 부대와 합류했고 “을” 부대는 회덕을 거쳐서 공주대교쪽으로 진군을 했는데 10월 21일부터 11월 11일까지 목천 세성산, 공주대교, 이인, 웅치, 효포, 우금치에서 전투를 했으나 수 천명이 전사하여 금강을 붉게 물들인 채 공주성 공격은 막을 내려야 했습니다. 한편 10월 17일 청주대접주였던 김자선은 4,500명을 이끌고 청주성을 공격하려고 초정부근까지 진출을 했지만 26일 일본군에게 패하고 고향인 보은 장안으로 후퇴한 후에 11월 18일 상주 유격병대에 붙잡혀서 총살을 당했습니다.
이 무렵 문의에 있던 동학농민군 1만3,000여명이 일본군과 전투를 했고 10월 29일 옥천 증약에서 동학농민군 110명이 전사했습니다. 11월 5일 청산 석성에서, 8일 청산 문바위골과 영동 양산에서, 11일 문의 지촌면에서 전투를 했고 최시형부대는 금산으로 후퇴를 했습니다. 10월 14일 남원을 출발한 김개남부대는 11월 11일 새벽 청주성에 맹렬한 사격을 가했지만은 2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또 많은 부상자를 낸 채 논산으로 후퇴했는데 이것이 서울로 가려던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12월 2일 전봉준이 순창에서 체포되었고 일본 토벌군에 쫓겨 전라도로 내려간 동학농민군은 12월 중순 나주전투에서 수천명이 전사했습니다. 11월 하순 손병희는 임실에서 최시형 직속의 북접농민군을 만나서 12월 5일 무주를 점령했는데 이때 1만명이 넘는 동학농민군은 대부분이 충북 출신이었는데 살이 보이는 헤진 옷을 입고 추위에 떨면서 허기진 채 지내야 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7일 무주를 떠나서 8일 설천을 거쳐 영동과 황간을 점거한 뒤에 10일 용산 장터에 주둔했고 11일 상주 유격병대를 격퇴시켰고 청주병영군 4명을 사살했고 16일에 보은읍을 점령했는데 이때에 동학농민군의 행렬이 30리에 달했다고 합니다. 동학농민군은 보은관아를 부수고 북실에 주둔했는데 운명의 날인 12월 17일밤, 이날따라 날씨는 몹시 추웠고 폭설이 퍼부어 농민군 1만여 명은 모닥불을 피우며 몸을 녹이고 있었는데 눈 쏟아지는 밤 어둠을 뚫고 일본군과 상주유격병대가 기습공격을 해 와서 이튿날 오후 3시경까지 치열한 전투를 했지만 전투가 끝났을 때에 하얀 눈으로 덮인 들판은 선혈로 붉게 물들었고 2,583명이 전사를 했으며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임국호, 이원팔, 정대춘 등 상당수 지도자가 여기서 전사를 했습니다. 동학농민군 일부는 속리산으로 숨어들어갔고 손병희와 손천민은 최시형을 보위하고 음성으로 피신했지만 현장을 빠져나가지 못한 동학농민군들은 일본군의 총칼 앞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야 했습니다.
존경하는 150만 도민 여러분! 우리 충청북도의 동학농민혁명은 어느 한 개 시·군이 아니고 충북도내 전 지역에 걸쳐서 또 대다수 도민들이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관심해도 되는 남의 일이 아니고 외면해도 되는 타 지역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이 자랑스러운 내 고장 역사를 새롭게 조명해 보려고 어느 누가 얼마만큼 관심을 가지고 얼마나 진지한 노력을 기울였습니까?
지난 수 십년 동안 북실전투 현장에 위령탑이라도 세워달라, 장안 유적지를 역사교육의 장으로 복원해 달라 후손들이 애절한 호소를 했지만 어느 누구도 들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에 최소한 10만명 이상이 참여를 했고 수 천명이 목숨을 바친 충북지역에서의 동학농민혁명의 실상과 동학농민군들의 존재와 활동상은 아직도 다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질문으로 특별법 제8조를 보면 정부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애국애족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 각종 사업을 추진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충청북도는 충북도내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사업을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 답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본 의원은 오늘을 사는 우리 충북 도민들은 110년전 선조들이 올곧은 선비정신으로 불의와 맞서 싸운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충북지역의 동학농민혁명사를 정당한 위치로 자리매김하는 과업을 우리가 앞장서 추진하는 것만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선대들의 명예를 진실로 회복시키는 길인 동시에 충북도민의 자긍심을 되찾는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한 날이 하루속히 앞당겨지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